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현명한 친구와 편지 주고받기

일상 2007. 9. 23. 23:45

저번에 만난 대학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.
나는 편지봉투만 보면 아주 약간은 가슴이 두근 거리곤 하는데,
워낙에 편지를 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.
그래서 아직까지도 진짜 친한 친구들에게는 (소심해 보일지라도) 편지를 끄적여서 내 진짜 속마음을 전달하거나, 심경의 변화 등등을 알려 주는 것을 즐긴다.

현재, 내가 편지를 줄 수 있을만큼 친한 친구는 3명.

뭐 예전에 군대간 애한테는 장장 8장의 편지를 쓴 적도 있었다. 글쎄,
그때는 우리집에 여러 우울한 일도 있었고,
날씨는 엄청 좋은데 금요일 오후에 도서관에 혼자 앉아서 학교 풍경이나 보고 close to you 같이 청승맞은 노래 듣고 약 한 달전에 군대에 애인을 보낸 내 신세에 취해서 한 순간에 8장을 휘갈겨쓰고 그대로 우체국으로 향했다.
그 편지를 한번 더 읽었다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박박 찢어 버릴 것이 뻔해서였다.
흐흐흐. 그래서인지 8장이나 썼음에도 그때당시 뭐라 썼는지 기억도 안나고, 뭐 분명 싸이코 스러운 이야기의 향연이었겠지. 싶다. 이자리를 빌어서 그 편지를 읽고도 나를 바보 취급 안해준 걔한테 고마움을 느낄 것은 뭐람.

어쨌든.
나에게 편지를 준 친구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인데, 대학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보다 못하다는 편견을 무참히 깨부수고, 거의 나와 No.1 으로 친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친하다. 1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M.T 기념 롤링페이퍼에다 그 친구가 써 주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. ' 앞으로 심상치 않은 friendship이 진행될 것 같지?' 라는 간단명료하고 기분 좋은 말이었다.

자꾸 안똔 체호프 얘기하니까 내가 안똔 체호프 말고는 아는 작가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(그만큼 빠져 있는 상태) 어떤 소설인지는 기억 안나도 이런 말이 나온다.

훌륭한 가정 교육이란 식탁보에 소스를 흘리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, 누군가 다른 사람이 실수로 소스를 엎지르더라도 모르는 체 하는 데 있지요.

이런 구절.
편지를 주고 받다 보면, 편지안에서만 하는 얘기는 이상하게 얼굴을 맞대하고는 거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, 그것은 그만큼 편지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실제로 하기 힘든 말일 수도 있는 것이고, 편지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 것이고 뭐 그럴 것 같다.

편지 뿐 아니라 음성으로 내뱉지 않고 글로 하는 말은 다 그런 것 같다. 나만 해도, 지금 블로그에 적고 있는 이 말을 실제로는 한마디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로 하는 것은 묘하게 그런 힘이 있단 말이다. 블로그, 일기, 심지어는 채팅, 문자 까지. 그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편지일 것이다.
너는 왜 글로 하는 태도랑 평소 태도랑 그렇게 다르냐? 넌 니 생각을 제대로 말못하는 병신이냐? 하면 또 할말이 없다. 난 진짜로 그렇다. 글로 할 수 있는 말은 분명히 따로 있다고 본다.

상대방과 편지를 주고 받기 위해서는 아.. 너 혹은 나는 이런 심경상태이고 너한테 이런 일이 있었구나. 하는 것을 다 알더라도 암묵적으로 실제 만나서는 그것에 대하여 거의 한마디도 안 꺼내는데, 우리 꼭 이렇게 하자. 라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된다는 것이 신기해서다. 그냥 그 친구가 괴로운 걸 꼭 이렇게 만나서까지 내 입으로 말해야 되나 싶은.

그 친구가 나에게 준 편지를 읽을까 말까. 고민을 계속 하다가, 아 이건 내가 좀 지쳤을 때 힘내야 할 때 읽자 싶어서 일주일이나 묵혀두었다가 너무 피곤해서 토할 것 같을 때 꺼내 읽었다.(그리고선 힘을 얻었다)

내 주변의 여성들은 어쩜 그렇게 일관적으로 남성과의 연애 에서 다 빗나가는 경향이 있는데,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. 다들 요즘 사람답지 않게 착한데, 왜 그럴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온다. 나야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지만.

지금 말하는 친구는 평소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데, 자기 전 하루 한 권 읽는 다른 내 친구 만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한 권정도는 거뜬하지 않을까. 싶다. 그래서 그런지 그 친구 편지는 나에게 아주 크나큰 힘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. 뭐 일단 책으로 쌓은 내공 때문인지, 글로하는 그 친구의 심경이나 나에 대한 위로에 대한 표현이 상당한 수준이니까.

나는 고백했다가 보기좋게 차였고, 그 뒤로도 2년동안 정신 못차리다가 상처만 입고 끝났다. 그 친구는 나보다 앞서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고, 나보다 현명하기 때문인지 딱 6개월만에 모든 것을 다 털고 마음정리를 끝냈다. 고백 이후 안 좋았던 일 이후, 그 친구가 했던 블로그를 통해서 혹은 편지를 통해서 어느정도는 그 친구의 심경을 다 알았던 것 같다. 그리고선 위에 말한대로 평소 때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.

그 친구 역시 내가 해왔던 우스운 짝사랑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.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거의 유일한 사람이랄까.
난 그 친구의 편지를 읽고, 3장짜리 답장을 썼다. 나는 또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. 도대체 왜 나는 아직도 그 사람 꿈을 꾸느냐. 하는 등의 자질구레한 내용들. 왜 이제 안보고 사는데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하는 등의 청승맞은 말들.;
내친구는 현명하게 일찍 정리를 했지만 가끔씩 한때 좋아했던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. 2005년 봄의 일이니 벌써 2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말이다.
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. 6개월만에 지독히 힘들게 모든 것을 급속도로 정리해버린 내 친구도 2년동안 가끔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데, 나는 도대체 몇 년동안 이래야 한다는 거지!! 이런.

이야기가 길어졌지만,
현명한 그녀도 빨리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고.
나도 그랬으면 좋겠다.

so, happy together 해야 할 것 아닌가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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