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금요일 오후에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

일상 2007. 10. 29. 16:53
금요일이지만 토요일도 일해야 되는 금요일이라 풀이 확 죽어선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.

그리고 외부에서 전화가 왔다.
시덥지 않은 질문이었다.
아는 대로 대답을 했다.

그런데 상대방 남자가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.
-여기서 풀색은 남자 파란색은 나.

"혹시 젊은 여자분 이시죠? 아직 아가씨죠?" (헉 아가씨??;)
"네? 네. 그런데요."
"아 저도 젊은 남자 입니다. 목소리가 상냥하셔서 그러는데 제가 시에 미쳐있거든요."
"아.. 네.."

"시 좋아하세요?"
"네? 네 좋아합니다."
(사실 그닥 좋아하진 않는다. 이해를 못해서)
"어떤 시인 좋아하세요?"
"기형도 좋아합니다. "
(내 책상앞에 붙어 있는 시가 기형도 시였기 때문에)
"엇 누구지? 그런 시인도 있나." (아니! 기형도를 모르면서 시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거야? 이 때서부터 난 이 사람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)
"제가 시를 읽어드리고 싶은데요. 괜찮을까요?"
"아. 네?"
(여기서 그럼 뭐라고 말하나. 절대 싫다고 할 수도 없고, 여하튼 대답도 안했는데 이미 읽고 있었음)
"안도현의 가을 엽서 입니다."

(완전히 진지하게 시낭송- 난 뭐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 사람이 왜이러나 미쳤나? 하는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)

"아 제가 한 개만 더 읽어 드려도 될까요?"
"아.. 네..;;"
"이정하 사랑할 수 없음은."
(또 다시 진지하게 시 낭송)
"아. 네 감사합니다." (뭐 어찌할바를 모르겠어서 나온 말이었다)
"이 세상에 사랑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알고 있죠?"
"네 알고있습니다."
(알긴 뭘 알아!!)
"앞으로 많은 사랑 하고 사시길 바랍니다."
"아. 네."

그러고 그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.
난 진심으로 무서웠다. 정말 진심으로 무섭다가, 전화를 끊고나서는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났다.

아니 세상에 태어나서 나한테 시 읽어준 남자가 이런 얼굴도 이름도 모를 남자라니!
편지로 시 쓴 걸 받은 적은 있었지만 난 또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.

난 그날 저녁에 친구를 만나서 이 얘기를 했고, 진짜 황당하지 않냐고 말했다.

그 남자 나름대로는 아마 전화 끊고. 자기 자신한테.
'짜식. 너 진짜 너무 멋있는거 아냐?' 이러고 의기양양 했을 지 모르지만.

난 황당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.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 했으니.
풋. 다시 생각해도 웃음난다.

그리고 그 사람이 읽어준 시를 오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봤는데. 이럴수가!!!
너무 닭살이잖아!
그래도 50대 넘어간 아저씨가 그런거 아니니까 다행으로 여기며 위안 삼기로 했다.
아 그리고 오늘은 월요일인데 오늘 다시 전화 안왔으니까!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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